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 발발 (문단 편집) == 전쟁 전야 == ||<-7>[youtube(J4sS1v8YuCs,width=100%)]|| ||<-7> 전쟁 직전 남북한 병력 상황 비교 (단위: 명) || || || 계 || 육군 소계 || 육군 전투 병력 || 지원 • 특수 병력 || 해군 || 공군 || || 국군 || 103,827 || 94,974 || 67,416(8개 사단•22개 연대) || 27,558 || 6,956 || 1,897 || || 인민군 || 201,050 || 182,680 || 120,860(10개 사단•30개 연대) || 61,820 || 15,570 || 2,800 || [[6.25 전쟁]] 관련 문서 공개 이전까지는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미, 영, 소 3국 수뇌가 38선을 경계로 신탁통치안을 합의했다고 여겼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문서번호 (319-ABC File 1942-1948, NO.387), 케네디 정부 시절 국무장관을 지낸, 당시 정책과장보 딘 러스크 (Dean Rusk)의 냉전비망록에 따르면 38선은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항복 의사를 표명한 당일 자정 무렵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려 하자 전쟁부 전략정책단 정책과장 본스틸과 함께 급히 그은 군사적 저지선이었다. 소련도 미국의 의견을 인정하고 38선에서 진군을 멈췄다. 이를 군사적 편의론이라 한다.[* 그러나 이완범은 논문(1995)에서 준비부족론과 군사적 편의론을 비판하였다. 8월 11일 급작스럽게 지어졌다는 준비 부족론은 증언 당시 사용된 지도는 30도선과 40도선이 표기되어 있었는데 30분만에 두 대령이 책임지고 업무를 추진한 것은 불가능 하며, 1944년 초부터 한반도의 군사점령은 논의되었고 1944년 12월 전략정책단장 런컨 준장이 일반명령 1호 초안을 작성하면서 정보부로부터 받은 자료와 지도들을 토대로 구상되어 온 것이며, 1945년 7월 4일 한반도 4분할안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45년 2월 OSS가 일찍히 작성한 38선을 인지할수 있는 더 낮은 축척의 지도를 사용하였고 이쯤을 전후로 38도선이 안이 등장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를 뒷받침 하기 위해 군사적 편의론을 비판하며 정치적 분할선의 의미를 주장한다. 양 국가 모두 모험을 강행한다면 미,소 모두 독점이 가능한 한반도였지만 준주변부적인 전략적 위치로 세력분할적 사고에 따르면 반분하는 위치가 극단론자를 제외하면 가장 알맞았으며, 7월 25일 포츠담에서 국무장관 제임스 번즈의 질문에 전쟁부 작전국장 헐 중장은 38선을 가장 중요한 위치로 판단한다고 하였다. 또한 38선은 양국 점령 후에 바로 봉쇄되면서 단순히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분할선이 아닌 실질적 세력선이 되었다.] 하지만, 남북한 모두 남북 분단이 가시화된 시점부터 상대 지역을 '미수복 영토'로 보고 북한에서는 '북한을 먼저 공산주의화시켜 민주 기지로 삼은 뒤 남한을 점령해 공산주의화시킨다'는 민주 기지론을,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주장했던 북진 통일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남한의 북진 통일론은 진정성이 있었는지, 그저 [[반공]] 이데올로기 조성을 위한 것이 아닌지에 대해 많은 의심을 받고 있다.[* 북한의 위협에 대해서 되지도 않는 헛소리까지 지어내서 말했으니 미국은 당연히 의심할 것이다. 가령 해주에서 서울을 포격할 수 있는 화포 4문을 방열했다거나(...). 참고로 해주에서 서울까지 거리는 구글지도를 기준으로 약 120km(...)이다. ~~뻥을 치려면 그럴듯하게 쳐야지. 그런데, 더 웃긴 게 송악산 전투 때 불발탄까지 회수하여 증거품으로 제출했음에도 육본에서 122mm 야포 보유를 믿지 않았다고 한다(...)~~[[http://blog.daum.net/mybrokenwing/567]][* 구글지도의 거리와는 달리 당시 잘못된 정부라든가 행정구역 등의 차이인지 약 70km라고 나와 있다.][[https://panzerbear.blogspot.com/2008/08/blog-post_19.html]]] ~~묘하게 [[북벌론]]스럽다~~ 게다가 이를 근거로 무기와 군사적 보조를 요구하는 이승만의 요구는 미국에게 그대로 묵살당했고, 당시 남한의 경제력은 사야할 무기도 제대로 못 사오는 데다가 미국이 제공한 무기도 전적으로 미국이 유지시켜주는 등[* 그리고 미국도 대대적인 군축으로 상태가 엉망이었던건 덤. 한 예시로 전쟁 당시 10여개에 달하던 기갑사단을 1개 외에는 전부 해체시켰을 정도다.] 형편없었다. 전차만 해도 한국군은 이미 소련에서 북한에 전차를 지원한 사실을 파악하고 전차의 도입을 추진하였다고 하는데 1949년 10월쯤에 미국에게 북한이 전차를 가지고 있으니 M26 퍼싱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미국측의 답은 한국의 교량 대부분은 M26 퍼싱의 하중을 감당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도 한국측은 전차 보유를 희망하였으나 급하게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북한의 전차를 얼마니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미국 측은 이승만의 반복적인 북진 주장 등으로 '''한국군이 전차를 보유할 경우 이를 이용해 북진을 추진할 가능성'''을 북한이 남침할 가능성보다 훨씬 높게 보았기에 공격용 무기는 배제하려고 하고 있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보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미군이 남북전쟁 때 수준이라고 폄하한 한국군의 전력이 한때 인민군보다 강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 인민군의 무력이 우리가 아는 야크기와 전차 242대로 증가한 것은 1949년 말에 들어서였다. 김일성이 금괴와 현물로 무기 값을 치르기 전까지는 스탈린이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탈린은 [[스페인 내전]] 당시 [[스페인 제2공화국|공화 정부]]를 지원했는데, 히틀러와 무솔리니로부터 대가 없이 막대한 지원을 받은 반대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프랑코]]와 달리 무상 지원이 아니라 공화 정부가 보유한 금을 대가로 무기를 판매했고 그마저 환율을 유리하게 책정해 공화 정부를 등쳐먹었다. 그리고 전세가 공화 정부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때마침 공화 정부의 금도 떨어지자 바로 손절했다. ~~현물만 받으시는 강철의 대원수~~] 아무튼 이때부터 북한군도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미국도 이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고 국군에 전차와 전투기를 지원하는 계획을 세워놓았지만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전쟁이 터져버렸다. 물론 한반도의 지형적 요건상 전차의 활용도가 높지 않고 한국군에게 지원한 바주카나 대전차지뢰 정도로도 충분히 대응이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도 크게 작용하긴 했다. 실제로 UN군이 전차를 끌고 왔을 때 지형문제로 상당히 고생했고 영국군 전차들도 종종 사고를 냈을만큼 전차를 대규모로 굴리기에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논두렁에 처박은 센추리온이라든가, 전복된 영국군 셔먼이라든가~~ 지형도 제한적이라 대전차지뢰만 잘 활용해도 효과를 거둘 수 있었으며 57mm 대전차포도 T-34를 상대로 좀 힘들기는 해도 320m 이내로 끌어들이면 정면이라도 격파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실제로도 수원, 낙동강 일대에서 전과를 냈으며, 청주에서는 18연대 소속 6파운더 1문이 무려 T-34를 3대나 잡았다.] 당시 한국군의 역량은 그런 상황에서도 전차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확히는 당시 지휘부가 국지전에 대한 대응력은 탁월했지만, 전차를 동원한 전면전에 대한 대응력이 부족했다. 흔히 당시 장병들의 훈련상태가 안 좋았을 거라고 '''착각'''하는데, 당시 국군은 '''3년 간 국지전을 경험한 부대'''였다. 당시 연대급 이상 부대 병력들의 전면전 훈련이 부족한 이유는 제대로 훈련할 시간도 없이 바로 실전에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8사단의 경우 6.25가 발발한 순간까지 강원도에서 빨치산 토벌 중이었으며, 다른 사단들도 다 국지전으로 북한군과 교전을 했던 부대였다. 8사단이 강릉을 빼앗긴 이유도 빨치산 토벌로 인해 병력이 분산되어서 조직적인 대응을 못했기 때문이다. 또 6사단의 뛰어난 포격 능력도 국지전의 결과물이다. 심지어는 한국군은 후방부대도 국지전 경험이 있는데, 여수순천 반란사건 때문에 후방부대도 동원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군이 전쟁 극초반 대규모 북한 병력의 전면 공격에 분쇄되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서울 강북지역을 내준 이후 낙동강 방어전 이전까지 국군은 국지전 경험을 바탕으로 T34 쇼크와 북한의 압도적 화력에 밀려나면서도 한강 도하 방어전 등 굉장히 치열한 지연전을 벌였고 화력 차이를 역전시킬 수 있는 미군 본대 도착 시까지 한반도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오히려 국군의 전반적 평균전투력은 지속된 후퇴와 지연전간 국지전 경험을 쌓은 배테랑들의 낙오와 전사로 사단 정원이 반토막나서 8시간 기초 군사 훈련받은 학도병으로 버티던 낙동강전선 때가 숙련도가 떨어졌다고 볼 수 있으며 이 역시 북한군 역시 국공내전으로 정예병이 되어 있던 병력들이 다부동-영천-포항-기계-마산 전투에서 박살나면서 9월 중순엔 전투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어쨌든 당시 남한에는 전차가 '''0대''', 전투기도 '''0대'''로 연습기만 10여 대가 있었던 반면 북한은 소련제 T-34 242대와 전투기 170여 대를 보유한 상태였다. 당연히 김일성으로서는 적화통일의 구미가 당기는 상황이었다. 중국 대륙 내에 있던 일본 전차라도 소유하고 있던 중국 국민당과는 달리 미국은 한반도와 제주도에 있는 모든 일본 전차를 폐기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보유한 탱크도 없었다. 그래서,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 참전용사들의 수기를 잘 읽어보면 '''"우리 국군에 [[탱크]]만 있었다면, 인민군이 남침했어도 이렇게 3일이라는 빠른 시간에 [[서울]]까지 금방 밀리지 않았을텐데..."''' 같은 증언도 많이 언급된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내부에서는 서서히 김일성에게 정치적인 힘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연안파 세력은 국공내전에 실제로 참전 중인데다가 소수 조선의용군이나마 입성하다가 소련에게 무장 해제를 당하는 등 북한 내에서 입지를 넓히기에 힘이 달렸고, 소련파 또한 행정가로서는 뛰어났지만 소련에서 태어난 한인 2, 3세로 구성되어 북한 내에 기반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결과 두 세력은 김일성파에게 협력하는 식으로 정권에 참여해야 했다. [[남조선로동당]] 세력은 활동의 연혁이 오래되어 지지 폭은 넓었으나 말 그대로 남한에서 쫓겨온 식이라 실질적으로 정치적 입지가 좁았다. 김일성은 서서히 이들을 압박해 나갔고, 그 결과 박헌영은 "우리가 남침을 행한다면 남한 해방을 원하는 빨치산 10만 명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지만, 1994년 공개된 북한-소련 외교문서에 의하면 김일성은 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남로당 봉기설은 접었다. 출처는 KBS 역사스페셜 한국전쟁 최대 미스터리! 북한군,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http://blog.naver.com/tmskdlvj4958/120094685403|#]] 김일성의 계획안은 대략 이러했다. * 한반도를 적화통일시킬 경우 * 한국이 소련에 편입될 경우 김일성은 [[소비에트 연방]]의 '까레야 공화국' 서기장이 된다. * 독립을 유지한 상태로 공산국가가 된다면 김일성은 적화통일된 한반도의 수령이 된다. * 전쟁에서 북한이 패배했는데 땅을 잃지 않을 경우 * 패배를 핑계로 패전의 책임을 박헌영을 비롯한 정적(政敵)들에게 죄다 뒤집어 씌워서 싹 [[숙청]]하고 비록 반쪽짜리일지언정 북한의 수령이 된다.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되었다.''' 실제로 1953년에 휴전이 되자 김일성은 이걸 핑계로 1955년에 자신의 정적인 [[박헌영]] 등을 포함해 연안파와 소련파를 숙청했다. 다만 [[최용건]]은 바지사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숙청하지 않았다. * 이 전쟁에서 북한이 패배하고 땅마저 잃었을 경우 * 멸(승)공통일, [[백화통일]]이라고도 한다. 김일성은 소련으로 망명해서 그곳의 군 수뇌부 중의 한 명이 되거나 중국 간도로 패주해서 북한 임시정부를 꾸린다. 언젠가는 다시 공산국가로 만들게 될 한국의 임시통치자의 직함도 겸하게 된다. 하지만 남북의 군사력 상황 상 도저히 북한이 질 것 같지가 않았을 것이므로 마지막 경우의 수는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결국 김일성이 나름대로 생각한 6.25 전쟁은 전혀 밑질 것이 없는 장사인 셈. 이기면 소련과 싸바싸바해서 득할 [[간도회복]]+한반도 적화통일하여 공산 대조선국가를 세워 수령이 되는 거고 패배함으로 인해서 잃는 것은 자신의 정적들이다. 최악의 경우까지 상정해도 보신할 수 있는 [[보험]]이 있었다. 김일성의 이러한 정치적인 목적 역시 6.25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김일성 혼자만의 착각이자 망상일 뿐이며 실제로 김일성과 스탈린의 생각 중에서'''만''' 비교해본다면 스탈린이 옳은 것이다. 만약 남한을 함부로 건드렸다가 미국과 전쟁에 말려들고 이게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지게 되면 김일성 본인 정도가 아니라 한반도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씨가 마를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전세계 인구의 과반수 이상이 죽어나갈 수도 있는 엄청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제3차 세계대전을 걱정했던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인지라 [[1.4 후퇴]] 당시 소련이 북한에 공군을 지원한 것을[* 물론 소련에서는 조종사들에게 중국어 교육을 시키며 중국어로 통신하라고 명령하며 했지만, 문제는 생사가 오가는 전장에서 생소한 중국어로 통신하는게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결국 조종사들의 항의에 어쩔 수 없이 명령을 철회했다.] 미군이 눈치챘으나, 수뇌부는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하여 적기가 소련 공군인 것을 알면서도 중공군이라고 불렀다. 결국 김일성 혼자만의 야욕 하나 때문에 인류사에 크게 악영향을 끼쳤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에 계속해서 지원을 요청했으나 1949년 이전까지 중국과 소련은 북한을 돕기에 곤란한 요소가 많았다. 중국은 비록 마무리 단계이기는 했으나 국공내전을 진행하고 있었고, 소련도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국토가 황폐화된 이래 미국에 대한 군사적 열세 의식을 지니고 있어 참전을 꺼렸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이 [[국공내전]]에서 우세를 굳히면서 1949년 10월 1일 정식으로 건국을 선언했고, 1950년 5월에는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때 중국 내 한국인들로 편성해 총괄하였던 조선의용군 2~3만 명이 북한 내로 유입되어 조선인민군을 증강했다. 소련도 생각보다 미국에게 밀리지 않고 냉전이 굳혀지는 상황을 확인했고, 1949년 6월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군사적인 자신감을 얻어 전쟁을 승인하는데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한때는 애치슨 라인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으나 현재는 소련 문서의 공개로 부정되고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cheson_line_seokj.jpg|width=100%]]}}}|| 반면 1949년 후반부터 1950년 초반까지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의 정세에 대해 다소 혼란스럽게 생각했던 듯하나, 앞서 언급했듯 대체적인 골자는 '남한 침공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였던 듯하다. 1949년 12월 작성된 미국의 NSC-48/2에서는 한국을 방위 지역에 넣지 않았으며,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에서도 한국과 대만을 방위 지역에서 제외했다.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북한의 공격 준비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삼팔선]] 지역의 교량 건설 작업이나 [[북한군]]의 배치 상황 등이 수많은 루트를 통해 [[맥아더]] 사령부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알면서도 무시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안중에 없었던 것에 가깝다. --히로히토를 호출하는 권위를 가지고 도쿄의 황제로 군림하고 있던 시기였다-- 애초에 한국은 형식만 맥아더의 관리지 미국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곳이라서 맥아더는 일본의 통치에만 골몰했으며, [[트루먼]]을 비롯한 미국 고위관료들의 인식 속에 소련이 미국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 아니라면 북한을 이용해서 남한을 밀고 들어오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즉 "남침할 것 같은데 일단 지켜본다"가 아니라 "그래봐야 남침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도의 태도였던 것이다. 문제는 아래에도 서술되는 바와 같이 영 꺼림칙해하는 스탈린을 김일성과 [[박헌영]]이 설득해서 무기거래 협정을 받아낸 데 있다. 미국의 인식과는 달리 오히려 북한이 남침을 계획하고 소련에 요구하고 있었다. 다만 1950년 4월, NSC-68에서는 이러한 눈치를 집약해 좀 더 적극적인 방위안을 계획했으나, 여전히 한국에는 특별한 군사적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1948년 12월, 소련이 북한에 주둔하던 소련군을 철수시키면서 간접적인 압박을 받아 군사 고문단만을 남겨둔 채 1949년 6월 남한에 주둔하던 미군이 철수한 바 있었고, 이를 원하지 않았던 이승만과의 갈등도 커졌다. 앞서 말했듯, 이승만과의 갈등은 도리어 가뜩이나 대대적인 군축중인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이 더욱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앞서 언급했듯,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남북간의 충돌은 소규모로나마 제법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1948년]] 남북한에 독립 정부가 구성된 이후부터 남북한 양측은 각자 내부에서 좌우익 간의 대립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38선에서는 크고 작은 국지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육군의 육탄 10용사도 이 당시 이야기다. 주로 [[개성시]], [[옹진군(황해도)|옹진군]], [[연천군]], [[양주시|양주군]] 등에서 이러한 국지전이 벌어졌는데, 대개 38선에 걸친 산과 봉우리를 두고 분란이 벌어졌다. 개성과 옹진은 도시를 남한이 영유하고 그 뒷산을 북한이 영유한 상태였으며 북한은 여기에 진지 구축을 시작했다. 비교적 뒤늦게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대한민국 국군]]은 이를 완화하기 위해 38선에서 걸친 고지의 점유에 보다 적극적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단, 이러한 국지전은 [[1949년]] 6월부터 8월 경까지 활발해지는데, 여기에 대해서 [[주한미군]]의 철수로 인해 불안해진 이승만이 [[애국심|국제적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서 공방전에 보다 적극적이었다]]는 설이 있다. 한편 한국에서도 북한의 남침을 예측하기도 했다. 1949년 12월 17일 정보국이 상부에 올린 '연말종합적정판단서'인데, 놀라울 정도로 북한의 초기 작전을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한국 정부는 이 보고서를 무시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한은 1949년 말까지 남침 준비를 완료했다. 적의 병력은 전차 150대, 항공기 200여 대, 각종 포 2,000여 문으로 장비된 10개 보병사단 약 19만여 명으로 판단된다. 적은 주공을 동두천-의정부-서울로, 조공을 개성-문산-서울, 춘천-원주, 속초-강릉으로 하여 선제공격할 것이다. 적의 기습 시기는 50년 3월경으로 예측되나 동북 지방의 중국군 출신 의용군 편입이 늦어질 경우 6~8월로 연기될 가능성도 있다. 적의 전차는 아군에 대한 결정적 위협이 될 것이며 공중 지원과 해상 게릴라의 상륙 침투를 병행할 것이다. 남침을 전후해서 무장 공비에 의한 남한 후방 교란 활동을 격화시킬 것이다. 적은 위장된 평화 정치 공세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이 보고서는 1949년 10월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이 작전정보실장이었던 [[박정희]] 소령에게 작성을 지시, 박정희의 주재하에 북한반의 [[김종필]]과 남한반의 [[이영근(1924)|이영근]] 중위가 공동으로 작성했다.[* http://www.kimjongpil.com/post/939] 그리고 6월 중순, 하순은 남한 지역의 농번기였고 당시에는 농업이 국가의 주력산업이었다. 실제로 인구의 60~7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한국군에서는 농번기에 장병들에게 모내기 휴가를 대대적으로 보내어 6.25 전쟁 개전 당시 한국 육군 전 병력의 3분의 1 가량이 휴가 상태였다. 물론 한국 정부나 국군이 바보라서 이렇게 휴가를 내보낸 건 아니었다. 1950년 2월에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일정이 그 해 5월로 결정되면서 한국군은 비상대비태세에 돌입했다. 당시만 해도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무장빨치산이 준동하던 때였고 3~4월에 걸쳐 전선에서 '위기설'이 퍼지고 있었던 시기다. 1950년 초반의 신문들을 찾아보면 이때까지도 빨치산 소탕작전으로 정신없던 모습을 볼 수 있다. 문제는 계속적으로 비상대비태세가 발령후 해제되지 않아 전군의 피로도가 심각한 수준에 달해 있었다는 것. 여기에 6월 중순 한국에 방문한 [[유엔]] 한국위원회에서도 한국군이 불필요하게 비상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점을 문제삼으면서 한국군은 별 수 없이 6월 24일을 기해 비상대비태세를 전면 해제하고 전 군에 대대적인 휴가를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왜 하필이면 비상대비태세를 해제하자마자 대대적인 휴가를 실시했는지가 의문일 수 있는데, 3개월이 넘게 휴가 외출 외박 없는 비상대비태세를 유지하다 보니 '''군량미가 바닥났기 때문이다'''(...) 반대로 휴가 장병들에 지급할 [[건빵]]은 창고에 가득 남아있었으니 울며 겨자먹기로 병사들을 밖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상대비태세가 해제된 후 처음 맞는 주말인 6월 25일 새벽, 북한은 전면적으로 남침을 감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